오오쿠마 시게노부 만리장성과 대풍가(大風歌)를 통해 중국의 본질을 이해하다
만리장성과 대풍가(大風歌)를 통해 중국의 본질을 이해하다
와세다 대학의 창설자로 메이지 일본에서 두 번이나 총리대신을 한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이미 10대에 중국 주자학의 한계를 간파했다. 중국의 사상체계가 역사 발전에 하등의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어 네덜란드 학문 난학(蘭學)에 몰두하다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해가지지 않는 나라 영국과 신흥 독립국 미국이라는 것을 다시 파악하고 배움의 방향을 급선회했다.
일본은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일동맹에 따라 연합국측에 가담해 칭다오의 독일군을 공격하고 산동반도를 점령한다. 그리고 위안스카이의 중국에 대해 21개조의 특혜를 요구해 관철시킨다. 이 때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자신의 중국관을 담은 중국인을 크게 논하다(中国人を大いに論ず)란 저서를 내게 된다.
오오쿠마는 유년시절 사가의 번교인 코도칸에서 주자학 강론에 이의를 제기해 퇴학처분을 받은 바 있는데 이미 이 때 중국의 사상과 민족성의 폐단과 관련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는 1915년 이전, 신해혁명이 발발한 1911년 와세다대학 강연을 통해 흔히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표현되는 중국의 왕조교체과정과 내전양상, 그리고 신해혁명과 그 이전의 내전이 어떻게 다른지를 명쾌하게 설명했다. 또 중국의 동란이 일본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고 일본은 어떻게 국익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밝혔다.
오오쿠마 시게노부의 연설제목은 ‘청국사정연구의 급무’(淸國事情硏究の急務)로 우선 중국역사의 왕권교체를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예로부터 군주의 권력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으로 믿는 천명(天命)사상이 있는데 중세유럽의 왕권신수설과 비슷해 하늘을 대신해 국민에 대하 절대무한의 권력을 휘두른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에게 선정을 베푸는 것이 도리인데 이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바뀐다. 새롭게 천명을 받드는 자가 주권자가 되는데 중국역사에서 22번의 혁명이 있어왔다.
그는 또 중국혁명을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한다. 첫 번째는 주권자가 자기 자식보다는 덕과 능력이 있는 자에게 권력을 넘기는 요,순,우(堯舜禹)의 사례인 선양(禅譲ぜんじょう). 두 번째는 유능한 제후가 폭군이나 암군을 무력으로 내쫓고 왕위를 차지하는 방벌(放伐ほうばつ), 세 번째가 진승오광의 난이후 한조가 들어서고 당송, 명청 교체기처럼 왕조 말년에 비적이 나타나면 이때를 틈타 왕조를 세우는 소란(騒乱そうらん)이다.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천명과 숙명을 믿고 운명이 흘러가는 데로 안주하는 것을 중국의 민족성으로 파악했다. 불행도 운명으로 체념하기 십상으로 그 운명에 저항하는 마음도 없으며 인력으로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용기도 없다고 했다. 인사를 다하고 천명을 기다리는 것은 그럴듯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방어적 국민이 됐다. 중국인들은 전쟁을 하더라도 총에 맞지 않기 위해 성이나 방어물에 몸을 숨기고 고개만 내밀어 적을 공격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오오쿠마는 중국과 일본의 전쟁양상을 비교한다. 일본에서 주요 전투는 드넓은 평원에서 양쪽 군대가 일거에 장렬하게 승부를 가르는 형태(실제로 일본에서 역사를 가르는 주요 전투들은 평원에서 이뤄졌다)지만 중국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신해혁명을 보더라도 신문에는 위대한 호걸이라도 있는 것처럼 보도되지만 실제로는 시가전이라는 것이다. 한커우(漢口)전투도 마을에서 인가의 벽에 숨어 철포를 쏘는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전쟁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세적이어야 하며 방어책을 쓰더라도 공세적방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만리장성도 중국인의 방어적 민족성과 연관 지어 설명했다. 인간의 힘으로 싸우는 것보다 방어물에 의존하는 중국인의 심성을 간파했다. 오오쿠마는 중국 4천년 역사중에 도덕적으로 분식된 유교를 버리고 법치로 국가를 다스린 진시황제를 그나마 높이 평가한다. 천명이 아닌 무력으로 천하통일을 한 것은 대단하지만 흉노의 침략위험을 구실로 장성을 축조한 것을 보면 그도 영락없는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또 진나라 이후 새롭게 400주를 평정하고 천하를 다시 통일한 한고조도 이적(夷狄)인 흉노에 대해 뇌물과 미인을 보내 달래며 화평을 추구한 것도 아이러니라고 평가한다. 한학에도 능통했던 오오쿠마는 한고조가 반란을 꾀한 영포(英布)를 격파하고 고향인 패현(沛县)으로 개선하면서 읊었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예로 들고 있다. 대풍가는 한조(漢朝) 내내 고조 유방(劉邦)을 기리기 위해 패현에서 종묘제사의 악곡으로 연주된 곡으로 앞의 두 구절은 전승 후 위풍당당하게 개선하는 심정을, 마지막 한 구절은 사방의 외적을 어떻게 막아내야 하는지 고민이 담겨 있다.
大風起兮雲飛揚、 (바람이 크게 일고 구름도 날며 솟구치네)
威加海内兮帰故郷 (천하에 무위(武威)를 떨치고 고향에 돌아가지만)
安得猛士兮守四方 (어떻게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의 외적을 막을 것인가)
오오쿠마는 남북조, 오호(五胡)의 난, 몽고의 원조, 만주족의 청조 등 한족보다 문명수준이 낮은 이민족들이 중국을 정복한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이민족이 문명이 우월한 한족에 동화돼 언어와 문자를 잃고 중국인이 됐지만 신해혁명은 중국보다 문명이 우월한 서구세력이 동아시아에 몰려온 서세동점의 시기에 발생했으며 중국의 정체를 완전히 바꾸는 역사적 사건으로 그 이전의 혁명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규정했다.
그는 또 중국인들이 일청, 일로 전쟁 이후 일본의 발흥에 자극받아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정치조직 개혁의 필요를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그 예로 캉여우웨이(康有爲)를 발탁해 개혁운동을 벌이다 서태후의 반동으로 좌절됐음을 들었다. 또 당송(唐宋)이래 시행돼 오던 과거제도를 폐지함으로서 만사 옛것을 숭상만 하던 중국에 있어 큰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오오쿠마는 또 중국의 신해혁명은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문제로 일본국민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중국에 눈독을 들인 영국과의 동맹을 맺고 다른 나라가 중국이 어려운 틈을 타 ‘불난 집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경계하는 동시에 혁명의 추이를 잘 관찰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 중국의 신해혁명이 일본 경제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그는 상품의 유통은 문명이 높은 나라에서 낮은 나라로 흐르는 법이라면서 일본의 생산물을 팔 가장 좋은 시장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일본의 제조업 수준은 아직 구미(歐美)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리적으로 가까워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면서 중국에서 면과 마, 양모를 사서 가공해 중국에 팔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요한 시장인 중국이 내란으로 상업부진에 빠지면 일본도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신해혁명이 발발한 이래 한달 동안 오사카와 코베의 상업이 입은 타격은 심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도 말했다.
서양통인 동시에 중국의 역사 문화를 이해하고 당대의 정세와 일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까지 연설한 오오쿠마는 신해혁명 당시 중국연구는 꾸준히 이뤄져야 하며 시종일관 일본국민은 중국이라는 것을 머리에 두고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만리장성과 한고조 유방의 시를 통해 대외적으로는 세력을 과시하지만 늘 외세를 두려워하는 중국인의 민족성을 간파하고 이웃국가인 중국을 경제적으로 어떻게 경영할 것인지를 제시한 오오쿠마의 중국관은 지금도 일본인들이 면면히 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