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에지마타네오미(副島種臣)의 기개(氣槪)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물리친 소에지마타네오미(副島種臣)의 기개(氣槪)
중국 수저우의 명찰(名刹) 한산사(寒山寺)와 관련된 유명한 당시(唐詩)로 장계(张继)의 풍교야박(枫桥夜泊)이라는 작품이 있다. 서기 755년 안사의 난(安史之乱)이 발생하자 당현종은 피신했고 장계를 포함한 많은 문사들은 전란의 영향이 미치지 않았던 쟝수, 저쟝지역으로 몰려갔다. 이때 장계는 수저우 성외에서 강남수향(江南水鄕)의 고즈넉한 가을밤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月落乌啼霜满天,江枫渔火对愁眠
(달은 지고 까마귀 우는 소리가 하늘에 가득하고 강 너머 단풍나무와 고깃배의 불빛을 보자니 우수에 차서 잠이 드네)
姑苏城外寒山寺,夜半钟声到客船。
고소성 밖의 그 적막한 한산사, 한밤중의 종소리가 나룻배까지 울려 퍼지네)
당 현종때 장계가 가을밤의 정서를 상찬 (賞讚)했던 한산사는 청말 1860년에 발생한 태평천국의 난으로 폐허로 변해 옛날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었다. 1876년에 이곳을 찾은 일본외무대신 소에지마타네오미(副島種臣)는 즉석에서 장계의 시를 살짝 비튼 한시를 지었다.
月落烏啼霜満天 江楓夜泊転凄然(달은 지고 까마귀 우는 소리 하늘에 가득하고 강너머 단풍나무를 보며 밤을 지내니 쓸쓸하기 그지없네)
兵戈破却寒山寺, 複無鐘声到客船 (전란이 휩쓸고 간 한산사, 종소리가 나룻배에 다시는 울려퍼지지 않네)
서기 755년 발생한 안사의 난에서도 무사했던 한산사는 태평천국의 난만큼은 피하지 못했다.
중국 고전과 한학에 정통했던 소에지마타네오미(副島種臣)는 당의 시인 장계가 추교야박(枫桥夜泊)이란 시를 지은 역사적 배경까지 꿰뚫고 시를 읊은 것이었다.
소에지마타네오미의 시를 접한 청나라 관리들은 일본인이 심오한 당시(唐詩)까지 패러디해 태평천국의 난으로 폐허가 된 강남수향을 즉석에서 묘사하자 한편으로는 경악하고 한편으로는 그 박식함에 존경심을 표했다.
이에 앞서 소에지마타네오미는 1873년 특명전권공사 겸 외무대신으로 일청수호조규비준서(日清修好条規批准書)를 교환하고 동치제의 결혼을 축하하는 천황의 친서를 제출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
청나라는 이전까지의 관례대로 동치제를 배알하려면 세 번 몸을 굽혀 아홉 번 절을 하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갖춰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에 대해 소에지마타네오미는 국제관례에 삼궤구고두는 있을 수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 단순한 공사급인 영,불,미 등의 베이징 주재 외교관과는 격이 틀리며 외무대신으로 천황을 대표하는 특명전권공사로 왔으니 대등한 국빈으로 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상서(尚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구절 “宾于四门,四门穆穆”(사방에 손님이 찾아오면 이에 대해 공경(恭敬)의 태도로 맞이한다.)을 인용해 청나라가 요순이래 정해진 법도를 어기느냐면서 강하게 압박했다.
중국의 고전까지 인용하며 예의 본질을 따지자 리홍장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소에지마는 청조와 절충을 거듭해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철회시킨다. 그는 국제관례대로 선 자세로 3번 목례를 하고 동치제(同治帝) 앞으로 나아가 그와 단독으로 회견했다.
애로우전쟁(1856~60년)의 결과로 베이징에 주재하기 시작한 다른 외국공사들은 그동안 청의 황제가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요구하는 바람에 늘 못마땅했었는데 소에지마가 전례를 깨자 그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사가의 일곱현인(佐賀の七賢人さがのしちけんじん)으로 꼽히는 소에지마타네오미(副島種臣)는 삼국연의와 제갈량전을 줄줄 외울 정도로 중국고전에 통달한 한편 서도(書道)에도 뛰어나 당대최고의 명필로 알려졌다. 이 뿐 아니라 영어와 국제법에도 조예가 깊을 정도로 고금의 학문에 막힘이 없었다.
그가 중국고전을 인용해 가며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철회시킨 일화는 나라간의 관계는 조공을 바치는 화이질서(華夷秩序)가 유일하다는 중국의 세계관을 역사적으로 처음 타파했다는 점에서 근대 일본외교사의 최대쾌거로 기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