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론 재배 온실에서 세계를 경영한 오오쿠마 시게노부

카테고리 없음|2020. 11. 9. 18:13

오오쿠마 시게노부  

 

 

 

오오쿠마 시게노부에게 있어 원예(園藝)는 만년의 취미였고 조예도 상당했다. 그는 외국손님이나 해외에서 귀국한 인사들이 열대식물이나 과일을 선물로 가져오면 이를 보전하기 위해 1887년 와세다의 사저에 온실을 지어 각종 분재는 물론이고 관엽식물인 야자, 호접란, 멜론을 재배했다. 

 



머스킷 멜론을 일본에서 가장 먼저 맛 본이가 오오쿠마 시게노부다. 오오쿠마는 당시 고급과일로 황족이나 귀족이외에는 구경도 하지 못한 멜론을 보급해 일반 서민의 식탁에도 오를수 있도록 여러 종자를 교배해 신품종의 멜론을 개발해 이를 ‘와세다’(早稲田)로 명명했다. 

 


멜론 재배와 열대 식물, 분재 보관에 사용된 온실(溫室)은 오오쿠마가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도 활용됐다. 온실이 지어지기 3년 전인 1884년부터 1922년까지 38년 동안 사저에 머물면서 수 많은 손님을 접견했다. 1922년 한해만 2만 3천명이 사저를 찾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는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방문객을 받았고 때로는 그들과 오찬을 같이했다고 한다. 힘든 일이었지만 비가 오기라도 해서 손님이 적으면 안타까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를 방문한 손님가운데는 해외인사들이 유독 많았다. 그와 관련이 있는 해외인사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동양의 인물은 중국의 캉여우웨이(康有為)와 쑨원(孫文)이다. 청나라의 캉여우웨이가 무술변법이 서태후의 반발과 위안스카이의 변절로 실패한 뒤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등의 권유로 일본에 망명했을 때 오오쿠마 시게노부는 자택근처에 캉여우웨이의 거처를 마련해주고 식비 등 금전적인 지원을 한다. 캉여우웨이는 청나라의 항의에 따라 일본을 떠나 영국으로 가게 되는데 오오쿠마는 이 때도 그에게 송금을 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캉여우웨이는 귀국길에 오르면서 일본을 들르게 되고 이때 오오쿠마와 다시 만나 세계정세를 논하고 와세다대학에서 강연도 한다.

 


중국의 국부라는 쑨원의 일본 내 후원자도 오오쿠마였다. 쑨원도 캉여우웨이처럼 1897년에 미야자키 토텐(宮崎 滔天)과 히라야마 슈(平山 周)의 주선으로 일본에 망명한다. 이 때 히라야마는 쑨원의 토쿄체제허가를 얻기 위해 외무차관인 고무라 쥬타로(小村 寿太郎)와 접촉하지만 일청관계가 악화될 위험 때문에 거절당하게 되는데 이 때 외무대신인 오오쿠마가 쑨원을 히라야마의 고용인 명목으로 체제를 허가해 일본에 머물게 된다. 쑨원은 오오쿠마의 저택근처 와세다쯔루마키쬬(早稲田鶴巻町)의 임대가옥에서 머물면서 오오쿠마를 접견한다.

 


쑨원은 신해혁명이후인 1913년 2월 25일 중화민국의 전국철도건설계획총재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해 오오쿠마 저택에서 와세다대학 관계자들이 주최한 환영회에 참석한다. 이 때 1차 환영식자리로 온실이 사용되기도 했다. 오랫동안 쑨원의 후원자였던 오오쿠마는 이 자리에서 “나는 손군과 이미 20년 이상의 오랜 벗인 것이다”(我輩は孫君とは已に二十年来の旧友である)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쑨원은 이에 대해 많은 청나라 유학생들이 와세다에서 배우고 일본에서 얻은 지식과 자각이 혁명의 성공을 가져왔다면서 오오쿠마와 와세다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실제로 1905년에 설립된 청나라 유학부에는 5년 동안 2천명의 중국인이 거쳐 갔다.

 


오오쿠마는 청나라의 캉여우웨이, 쑨원뿐만 아니라 조선의 김옥균,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환보이차우(潘佩珠)도 후원했으며, 멜론을 재배한 온실이 딸린 사저에서 인도의 타고르, 몽골의 왕족, 필리핀의 정치인, 러시아의 혁명파,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중남미의 정,재계, 학계의 수많은 인사들을 접견하면서 일본의 국익을 도모했다.

 


오오쿠마는 1922년 사망하기 직전 타이완산 호접란(胡蝶蘭)을 선물 받고 기뻐했으며 꽃이 언제 피느냐고 병상에서 매일 주변인에게 묻는 것이 일과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아침 만개한 것으로 전해진다. 

 


메이지 쇼와시대의 사상가이며 언론인이었던 토쿠토미 소호(徳富 蘇峰)는 잡지 ‘대관’(大観)에 오오쿠마 시게노부의 사망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그의 와세다 저택은 사설외무성, 사설국제구락부였다. 세계의 손님들이 닛코(日光)와 하코네(箱根)는 유람하지 않더라도 와세다의 노인(오오쿠마)만큼은 반드시 면회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국민적대표자였다. 우리 일본은 이런 위인을 잃어 한량없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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