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티벳에 관한 진실과 역사적 사실
서구에서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 이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이는 프랑스의 알렉산드라 다비드넬(Alexandra David-Néel 1868~1969)이다. 국내에는 ‘백일년 동안의 여행’(The Secret Lives of Alexandra David_Neel)이란 평전(評傳)으로 잘 알려진 ‘괴짜’ 여성이다.
한때 오페라의 프리마돈나로 활동하다가 갑자기 붓다의 가르침을 찾아가는 영혼의 순례자가 된 1924년 백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티벳 라사를 순례한다. 중국 윈난성을 출발한지 4개월만에 히말라야를 넘어 13대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여러 다채로운 경험을 한다.
알렉산드라 다비느넬의 역마살은 대단했다. 티벳을 포함해 인도, 버마, 실론, 중국, 조선등을 여행하면서 경비는 14년동안 떨어져 있던 유럽의 남편으로부터 조달했고 돈이 떨어지면 ‘한끼 줍쇼’식의 도보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형편없는 음식도 하인이 요리하게 했으며 매일 저녁 온수로 목욕하고 차를 마셨다고 하니 요즘 말하는 소위 ‘된장녀’의 기질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은 했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에 아나키스트, 페미니스트란 명칭은 당연히 따라붙었고 라사를 처음 순례해 이후부터는 인류학자, 언어학자, 소설가, 저널리스트, 불교학자, 탐험가, 구도자등 온갖 수식어로 불리워졌다.
여하튼 알렉산드라는 대단한 여성이긴 하다. 출판사 돈으로 여행을 하고 적당히 시류에 영합해 베스트셀러를 내는 한국의 흔한 여성작가와는 다르다.
알렉산드라는 로렌스 펄링게티, 앨런 긴즈버그 같은 1960년대 미국의 반체제 시인들과 뉴에이지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도 ‘티벳’이라고 하면 그저 막연한 신비스런 이미지 때문에 ‘명상’ ‘요가’ ‘힐링’ ‘영혼의 구도’같은 단어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노동계의 시위에서 흔히 등장하는 ‘오체투지’도 티벳 불교의 것이다.
티벳에서 이 같이 설명하기도 힘든 막연한 긍정적 이미지를 걷어내고 모더니티(modernity)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들은 잘 모르는 새로운 것들이 많다. 특히 조선의 역사와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비슷한 면이 아주 두드러진다.
필자가 베이징 특파원이었을 때 티벳 소요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중국CCTV는 달라이라마 시절 티벳의 신정체제(Theocracy)를 비난하고 중국이 티벳의 근대화를 이끌어 현지인들에게 문명의 세례를 안겼다는 선전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다.
내용은 달라이 라마 시절 라사의 포탈라궁에는 중세 유럽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각종 고문기구들이 즐비하고 죄수를 가뒀던 지하 감옥에는 전갈을 키웠다는 것이다. 영국제국주의의 영향권하에 있었던 달라이 라마와 고관들은 영국산 비스켓과 통조림등 사치품을 향유했었다는 것도 흑백 자료화면으로 나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중국이 티벳을 무력으로 점령한 이후 반체제 성향을 지닌 티벳의 승려와 비구니들을 체포해 성교를 하도록 강요하는 등 무자비한 인권탄압이 이뤄진 것도 사실이지만 티벳 신정체제의 인권상황은 그 이상 열악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많은 티벳 연구자들에 따르면, 중국이 무력으로 점령한 1959년 이전 티벳 인구의 95%는 봉건체제하에서 사유재산으로 간주돼 매매도 가능한 농노나 노예 신분이었다. 당시 평균수명은 35.5세, 문맹률은 90%이상이었다. 라사의 인구 가운데 12%는 구걸로 연명했다.
2009년 2월 11일 영국의 ‘가디언’지는 ‘What we don't hear about Tibet’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서구세계가 중국의 강제점령만을 비난하고 있는 사이 달라이 라마체제의 봉건적 티벳에서 자행된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눈감는 성향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서양인들은 달라이 라마의 통치하에서 티벳인들이 비폭력적이고 정신적으로 평화로운 문화속에서 살았던 것으로 낭만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2008년 12월 중국종교국의 예샤오원은 ‘차이나 데일리’에 기고한 글에서 티벳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샹그릴라가 아니라 봉건노예제 국가였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중국공산당의 선전이기는 하지만 팩트 자체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중국이 티벳의 봉기를 진압하고 달라이 라마가 망명한 1959년 이전까지 98%의 인구는 농노제의 노예였으며, 라사 외곽의 드레풍 사원은 185개의 영지에 2만 5천명의 농노, 300개의 목장에 1만6천명의 목축인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지주집단이었다. 고위 라마승과 세속의 지주는 무지막지한 세금을 부과했고 소년들을 사원의 노예로 삼는 등 티벳의 부를 모두 장악했다. 저항하는 노예는 눈을 찌르거나 오금의 힘줄을 절단하는 고문도 서슴치 않았다.
라사 대학의 영어 교수인 타시 체링(Tashi Tsering)은 중국의 점령이 티벳의 신정체제보다 가혹하다고 여기지 않는 인사 가운데 하나로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을 상기한다. 드레풍 부근에서 살다 13세 때 달라이 라마의 개인 가무단으로 강제 차출당한 그는 교사들에게 폭행당하고 보호를 구실로 승려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회고했다.
체링은 워싱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중국이 점령한 티벳에 1964년 귀국한 뒤 티벳이 중국덕택에 근대화됐음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그는 문화혁명때 체포돼 6년 동안 노동교화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여전히 모택동이 티벳을 해방시켰다고 여긴다.
1959년 이후 중국은 노예제와 불공평한 과세를 폐지한다. 사회간접자본 투자로 일자리를 창출했다. 병원, 학교, 수도 시설을 보급한 결과 평균수명은 1950년의 두 배에 달하는 60세로 늘어났다.
로이터통신에도 비슷한 기사가 게재된 적이 있다. 로이터는 달라이 라마 체제하에서 농노였다가 중공중앙통일전선공작부의 부부장이 된 티벳인 시타르(Sitar)라는 인물을 소개했다. 달라이 라마를 공격하는 가장 저명한 티벳인으로 부상한 그는 달라이 라마 시절 노름을 하던 라마승들이 “어제 잃은 세명의 농노와 7마리의 말, 20개의 은전을 오늘 갚을 것”이란 편지를 본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당시 농노가 가축, 화폐나 다름없는 존재였다면서 티벳인들은 스스로 인권을 지켜야 하며 인구의 대부분이 노예였던 시절로 회귀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마이클 패런티의 저서 ‘Friendly Feudalism: The Tibet Myth’에 따르면, 티벳의 노예는 신분이 대물림됐고 결혼하는데도 라마나 주인의 허락이 있어야 했으며 주인이 그들을 누군가에게 빌려주면 가족들과 생이별해야 했다. 또 그들은 도주하거나 반항할 경우 눈을 찌르거나 혀를 뽑고, 오금의 힘줄을 절단하거나 사지를 자르는 혹형에도 처해졌다.
The Timely Rain: Travels in New Tibet을 쓴 여행작가 Gelder, Stuart and Roma도 1960년대 티벳을 답사하면서 Tsereh Wang Tuei라는 고문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그는 사원소유의 양 두 마리를 훔쳤다는 죄목으로 눈을 찌르고 팔을 절단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런 혹형을 당한 그는 살생을 금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인데 라마가 어떻게 이런 형벌을 내릴 수 있느냐면서 종교를 버렸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또 일부 죄수들이 태형에 처해진 채 그냥 방치돼 동사했다고도 한다.
신정체제 농조제하에서 자행된 이 같은 인권유린 행위들을 두고 SUNY의 중국, 티벳 권위자인 탐 그룬펠트(Tom Grunfeld)는 중세유럽의 암흑기와 달라이 라마의 티벳이 완전히 똑같다고 평가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