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군신(軍神)인가 우장(愚将)인가?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1912년 9월 13일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의 장례식 날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대장(大將) 부부도 따라서 목숨을 끊었다. 소설가 나쯔메소세키(夏目漱石)는 코코로(こころ)에서 “메이지의 정신은 메이지 천황과 함께 끝났다고 등장인물을 빌어 말하고 있는데, 메이지 천황에게 충성을 다했던 노기의 죽음은 메이지 시대의 종언을 확인시킨 또 다른 마침표였다.
일로(日露)전쟁 직후 메이지천황을 알현하면서 그는 “자결함으로서 폐하의 장병들에게 많은 사상자를 낸 죄를 갚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메이지는 “괴로운 심경은 이해되지만 짐이 세상을 떠난 뒤 그리하시오”라면서 만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기마레스케는 국력이 몇 배나 강한 러시아를 패퇴시켰지만 개선장군이 아닌 패장의 모습이었다. 노기는 수많은 장병을 희생시키고 얻은 말뿐인 개선에 대한 괴로운 심경을 한시(漢詩)로 남겼다.
凱旋
王師百萬征強虜 천황의 백만 군대는 강한 러시아 군대를 정벌했네.
野戰攻城屍作山 야전에서 공성전을 벌여 시체는 산을 이뤘다.
愧我何顔看父老 부끄럽다 무슨 낯으로 (군인들의)부모들을 볼까,
凱歌今日幾人還 지금 개선이라고 하지만 몇 명이나 살아 돌아왔는가,
노기마레스케는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는 자책감에 시달렸다. 귀국하기 직전에는 “차라리 전사해 뼈가 돼 돌아가고 싶다.”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삿갓이라도 눌러쓰고 귀국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귀국해서는 축하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전사자들의 가족들을 찾아가 “내가 당신들의 자제를 죽인 것이다. 그 죄는 할복해서라도 사죄해야 하지만 지금은 아직 죽어야 할 때가 아닐 뿐이다. 훗날 내가 목숨을 버리면 사죄한 것으로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기는 1904년 일로전쟁에서 뤼순요새 공략을 위한 전초전으로 진저우(金州)를 공격한 뒤 참혹했던 전장을 뛰어나게 묘사한 시도 남겼다.
金州城
山川草木轉荒涼 산천초목이 (포격으로)황량하게 변했고
十里風腥新戰場 십리의 바람에는 전장의 피비린내가 진동 하네
征馬不前人不語 군마는 나아가지 아니하고 병사들은 말이 없고
金州城外立斜陽 금주성 밖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서 있네
이시는 중국의 근대 지식인 곽말약(郭沫若)이 일본인이 쓴 한시 가운데 최고 걸작이라고 극찬한 작품이다. 진저우는 노기가 일로전쟁에 출전하기 전 장남인 카츠스케(勝典かつすけ)가 전사한 곳이다. 산중턱에 전사한 병사들이 매장되자 노기마레스케는 부관을 시켜 맥주를 묘비에 바치고 거수경례를 하고는 스스로 남은 맥주를 마셨다고 한다.
노기는 뤼순 공방전의 최대 격전지인 203고지 전투도 묘사한다. 역시 시신이 산을 이룬 격전이었는데 자신이 입안한 총공격에서 차남인 야스노리(保典)마저 전사한다. 노기는 203의 독음이 니레이산(にれいざん)인 것에 착안해 ‘爾靈山’란 제목의 한시를 짓는다.
爾靈山 (にれいざん)
爾靈山嶮豈攀難 203고지가 험준하니 어찌 오르기 힘들지 않겠는가,
男子功名期克艱 남아의 공명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하는 법,
鐵血覆山山形改 병사들의 철혈이 산을 덮으니 산의 모습이 바뀌었네,
萬人齊仰爾靈山 만인이 그러한 203을 보며 기릴 것이네,
1894년 일청(日淸)전쟁당시 보병 1여단장으로 참전한 노기마레스케는 포터우산(破頭山), 진저우(金州)에서 대승을 거두고 뤼순(旅順)요새를 하루만에 함락해 영웅으로 떠오르는데 1904년 일로전쟁이 발발하자 또 다시 전장에 나간다. 이때가 장남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접한 뒤였다.
러시아군이 방비를 갖추고 있었던 뤼순요새는 일청전쟁때와는 달랐다. 일로전쟁당시의 뤼순요새는 정예부대가 주둔했고 콘크리트 보루에 해자, 중화기까지 갖춰 어떤 적이 공격해도 3년은 버틸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철벽의 성채였다.
일본군이 막대한 인명피해를 냈지만, 요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날마다 전사자만 늘어가자 대본영에서도 노기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고, 시민들은 노기마레스케의 집에 몰려가 욕설을 하고 돌을 던졌다, 이 와중에 노기의 장남에 이어 차남까지 전사하자 군중들의 분노는 약간 수그러들었다. 차남이 전사했을 때 노기는 “잘 전사해주었다 이로서 세간에 면목이 섰다(よく戦死してくれた。これで世間に申し訳が立つ)”고 나지막하게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노기마레스케가 입안한 뤼순공방전의 사상자는 6만명을 헤아린다. 203고지에서만 1만 5천명이 전사했다. 전사자가 너무 많아 노기는 무능(無能)한 어리석은 장수(愚将)란 악평이 따라붙었다. 이런 악평은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 때문이다.
시바료타로는 작품 ‘殉死’(1967년작)와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 1968년부터 72년까지 산케이 신문에 연재)에서 가차없이 노기를 혹평했다. 시바료타로는 육군중장이었던 谷寿夫(たに ひさお)의 기밀일로전사(機密日露戦史)를 참고했다. 이는 당시 노기에 비판적인 대본영의 입장만을 담고 있어 후세에 객관성이 부족하고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언덕위의 구름’에서는 노기마레스케와 그의 참모장인 이치지고스케(伊地知幸介)를 상당히 어리석게 그리고 있다. 이치지고스케는 진저우의 남산(南山)을 함락한 26일이란 날자를 길일(吉日)이라 집착한다. 13으로 시원하게 쪼개지는 짝수라면서 매달 26일마다 대공세를 펼치는 뻔한 전술에 러시아군이 대비하는 바람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또 만주 사령부의 참모장 고다마겐타로(児玉源太郎)가 파견되자 280mm포로 노기가 그토록 고전했던 뤼순공략을 나흘만에 완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사가(史家)들이 논거를 들어 반박하면서 노기 무능론은 소수의견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자료들이 福田恆存의 노기장군은 군신인가 우장인가(乃木将軍は軍神か愚将か), 桑原嶽의 명장 노기마레스케(名将 乃木希典) 別宮暖朗의 여순공방전의 진실(旅順攻防戦の真実), 長南政義의 신자료에 따른 일로전쟁사 뒤집혀진 통설(新資料による日露戦争陸戦史~覆される「通説」~)등 이다.
이들에 따르면, 참호를 이용한 요새를 돌파하는 효과적인 전술이 고안된 것은 제1차세계대전중기로 일로전쟁당시에는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각오하고 보병을 돌격시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 최대의 전투였던 베르덩 공방전에서 독일과 프랑스군 양측을 합쳐 70만명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과 비교하면 뤼순공방전의 인명피해는 준수하다는 평가인 것이다. 베르덩 공방전 역시 중무장된 요새를 둘러싼 지리한 전투였다.
노기장군이 불행한 것은 과거에 일본군이 뤼순같은 요새를 함락시킨 경험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뤼순요새의 보루는 두께가 2미터나 되는 콘크리트 형태로 웬만한 포격에도 견딜 수 있었으며 안에는 대포와 기관총이 설치돼 있었다. 또 주위에는 깊은 해자는 물론이고 전기 철조망에 지뢰도 매설돼 있었다. 그야말로 과학기술과 축성술이 집약된 무적의 요새였다. 화력도 러시아군은 대포가 5백문이었지만 일본군은 3백문에 불과했다.
시바료타로는 노기가 쩔쩔맨 뤼순 공략을 코다마겐타로가 포병을 이용해 순식간에 해낸 것으로 묘사했지만 전사가(戰史家)들은 만주에서 온 코다마가 지휘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아 포격을 실제로 지휘한 것은 노기마레스케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공병대로 하여금 참호를 파서 순차적으로 나아가 폭약으로 요새를 폭파하기도 해 ‘언덕위의 구름’에 나오는 것처럼 단순하게 보병의 발도(拔刀)돌격만 지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에 대한 평가는 군신(軍神)에서 우장(愚将)의 양극단을 오가고 있지만 일본 부시도(武士道)의 관점에서는 죽음으로서 명예를 지킨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가 처음 죽음을 결심한 것은 사이고다카모리의 반란으로 발발한 세이난전쟁(西南戰爭)에 참전해 천황이 하사한 군기를 사쓰마군에게 빼앗겼을 때였다. 참을 수 없는 치욕에 사쓰마군이 돌격해 오면 그 정면에 나서서 적탄에 맞으려 하는 등 여러차례 스스로를 사지에 던졌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된 메이지천황은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최전선에서 그를 빼라고 명령했다.
이후 덤으로 생을 살게 됐다고 생각하게 된 노기마레스케는 늘 무인으로 죽을 시기를 고민했으며 메이지천황이 죽자 곧바로 목숨을 끊으면서 젊은 날 군기(軍旗)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사죄를 유서에 적었다.